직장 얘기 XXX
평생 문과로 살다가 개발 직군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
제목에 단어가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없다. 나는 작년 3월부터 개발자로 출근했다. 보통 백엔드라고 적긴 했지만 업무 환경 상 프론트 + 백 둘 다 하고는 있다. 회사에서는 주로 자바스크립트 + 자바 + SQL을 다룬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 시기에 진로를 소설가로 정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당연히 문과를 골랐다. 대학교를 진학할 때에는 전공도 문예창작학과로 정했다. 다른 학과는 안중에도 없었고, 입시에서 떨어진다면 대학 진학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생활은 즐거웠다. 주변에 재밌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공 수업은 기대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들을만 했다. 그리고 눈 떠보니 졸업 시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복수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학교에 다니면서 그 흔한 토익, 토플 같은 어학 시험조차 친 적 없었다. 돈은 벌어야겠는데, 뭘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집 주변에서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서 평일 내내 8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일을 했다. 휴학을 한 적이 없으므로, 휴학한 셈치고 일을 하면서 뭘 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문예지나 신춘문예 등단을 노리거나, 인터넷 소설을 연재하거나, 출판사 또는 신문사 또는 방송사 같은 전공과 관련된 직장을 알아보거나, 일반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것 정도였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쓰기를 병행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태블릿을 들고다니면서 점심 먹으면서, 퇴근 후에 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글쓰기를 업으로 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직장을 다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취직을 준비하면서 자격증은 필요할테니 퇴근하고 무작정 컴퓨터 학원에 갔다. 학원에서는 이것저것 가르친다고 했다. 나는 컴활을 따기로 했다. 퇴근을 하고 바로 학원에 가서 한두 시간 공부하다가 스터디 카페에 갔다. 둘 다 집에서 해도 됐을 것 같은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분위기에서 주는 안도감이 좋았다.
컴활에서 실기를 공부하는데 비주얼베이직을 이용해서 간단한 코드를 짜는 게 있었다. 기껏해봐야 if문이나 switch문 정도였을 텐데 그게 참 재밌었다. 대학다닐 때 교양으로 들었던 파이썬이나 스크래치 수업(자의X 안들으면 졸업 못함...)은 듣는 게 그렇게나 고역이었는데. 나는 결국 종강할 때까지 for문 문법을 외우지 못했지만, 졸업한 뒤에야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처음으로 코딩이 배워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자격증을 딴 뒤 곧장 코딩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았다. 내 지역은 소도시여서 그런 학원은 없었고, 아무래도 인근 큰 도시로 다녀야 할 것 같았다. 대신 내일배움카드로 배울 수 있는 인터넷 학습처가 있길래 바로 수강했다. 한두 달 정도 들었던 것 같다. 입문자용이다보니 다루는 내용이 너무 적어서 좀 더 전문적인 내용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국비지원으로 다닐만한 학원은 없었고, 인터넷으로 강의하는 부트캠프가 몇 있었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수강신청을 했다.
강의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맛보기로 열어준 강의를 따라가는 것조차 머리가 어지러웠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수포자였고, 과학 계통 선생님들은 내 얼굴을 모를 정도로 내내 잤다. 그런데 그냥 했다. 사실 주변에서는 계속 만류했었다. 누가 들으라고 협박한 거 아니고, 내가 듣고 싶어서 듣는 거고, 막상 또 듣다보니 알 듯 말 듯도 해서 계속 들었다. 시간은 자꾸만 가고 수료일은 다가오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료구조가 뭐고, 알고리즘이 뭐고, 개발자짤을 보면 막 이해가 돼서 웃긴데, 내가 짤 수 있는 코드는 아무것도 없는 것도 웃겼다. 마치 대학을 졸업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어서 다시 졸업식이라도 하나 싶었다.
그래도 계속 해보고 싶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은 보려고. 개발 관련한 인터넷 강의를 더 샀다. DB, 설계, 언어 관련된 책을 막 샀다. 부트캠프를 마치고(사실 제대로 된 수료도 아니었음) 반년정도 더 공부해서 포트폴리오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었다. 구직 사이트를 가리지 않고 이력서를 수십, 수백 개씩 넣고 아무데나 연락오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그중 하나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취직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 아침마다 출근해서 레거시 코드로 범벅된 SVN과 이클립스를 보면 눈물 한번 흘려주고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작년, 재작년으로 돌아간대도 개발을 계속 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내 성향에는 잘 맞고 만족스럽다. 개발은 늘 고통스럽지만 해결된다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래서 문돌이 1000%였던 내가 개발자로 살게된 걸 딱히 후회한 적은 없다. 만약 전공을 살려 취직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저마다의 고통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 개발자 할까말까 고민한다면 나는 무조건 추천할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점이다. 개발은 사실 안 맞으면 모를 수가 없다. 적성에 안 맞는데 취직을 노린다면 빨리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제는 무작정 배운다고 취업을 보장할 수가 없다. 특히 공부하기를 싫어한다면 절대 비추하는 직업.
취업시장이 얼어붙니 마니는 대부분의 업계가 비슷하고 정도의 차이만 있지 않나 싶다. AI의 발전이 어쩌니마니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AI의 발전으로 개발자의 생계가 위협받는다고 하지만 이 역시 개발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발자 인력의 대부분이 대체될 정도라면 다른 직종이라고 살아남을 것 같은가. 살아남더라도 그게 몇 직군이나 될 것 같은가. 종종 강 건너 불 구경 같은 태도를 보고 있으면 그냥 우습다.
가끔씩 블로그가 생각나 들어와보는데 예전에 올려두었던 취준 근황 글이나 코딩테스트 글을 여전히 보는 사람들이 있어, 생각나는대로 작성해보았다. 아마 코딩에 입문하거나 적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에 자신감을 잃지 말고, 남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좋은 결과가 있기를.
쓰다보니까 너무 길어져서 직장 이야기는 다음에나 해야겠다... 그래봐야 별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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